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대한 독재자 (문단 편집) == 상세 == [include(틀:스포일러)]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치가 무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4년 동안 지속된 지옥과도 같은 1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잊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우리는 전쟁의 포화에 상처입고 사지를 절단당한 환자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눈과 시력을 잃고 턱이 날아가고 온몸을 뒤틀며 발작을 일으키는 전쟁 불구자들을 그렇게도 빨리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에 나가 죽지도 않고 부상도 당하지 않은 자들 역시 똑같은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헤어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 같이 전쟁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었다. 전쟁의 폐허 뒤에 남은 것은 늙은 노인네들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안고 세상과 전쟁을 증오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이런 전쟁의 상흔을 잊고 전쟁을 미화하는..."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My Autobiography, 1964)> 중에서)[* [[https://arthurjung.tistory.com/359]]] 영화는 1938년의 [[안슐루스]](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관한 국제 정세를 풍자한다. 채플린은 '독재자'로 제목을 정하려 했으나 이미 등록되었기 때문에 살짝 바꾸어 등록하였다고 한다.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0년대부터 제작이 시작되었으며 1940년 개봉 당시에도 미국은 유럽 전선에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아직 나치와 전쟁 상태가 아니었기에, 미국인들은 나치 치하 독일의 내부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실 나치는 집권 초기인 1930년대 초부터 [[다하우]]를 시작으로 강제수용소를 세우기 시작했으나 대외적으로 철저한 기밀을 유지했기 때문에 수용소 존재 여부와 실태는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다. 수용소에서 학살극이 시작된 것은 1941년.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이나 미국에는 나치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히틀러를 그저 유능한 지도자로 여기던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이다. 심지어 영화를 제작한 채플린 또한 [[홀로코스트|유대인 강제수용소]]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독일 내부나 미국에서도 강제수용소는 소문으로만 퍼져 있었고 미국도 그런 수용소를 피해(정확히는 게토지만 수용소 취급이다. 그래도 이쪽은 불안정하게나마 게토 내에서의 자유는 통제되었지만 일부나마 있었다.)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을 다시 독일로 돌려보낸 전적이 있으니 수용소는 [[도시전설]] 쯤으로 여기고 만들었을 듯하다.] 1960년대에 채플린은 인터뷰를 통해 만약 자신이 나치의 절멸수용소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다면 나치를 희화화한 이 영화를 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강제수용소를 상상해낼 정도로 나치의 위험성을 인지하던 그조차 '''현실이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 한 것. 그래서 작중 등장하는 강제수용소는 수용자들을 잡아 가둬 강제로 일 시키고 갈구지만 대놓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고 그럭저럭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반적인 수준의 교도소나 강제수용소''' 수준으로 묘사한다.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고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면 바로 나치 미화 논란에 휩싸일 수준. 참고로 찰리 채플린은 최소 [[집시]]계 또는 집시 혈통으로 알려졌는데 나치는 집시도 모조리 절멸수용소에 가두고 죽였다. 평소 자신의 집시 혈통에 대해 자랑스러워한 채플린에게는 이 사실이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풍자 코미디 영화이다 보니 작중의 힌켈(아돌프 히틀러를 패러디한 작중 국가 '토메니아'의 독재자)은 기본적으로 희화화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독재자로 그려진다. 한 예로 지나친 근로시간, 임금 삭감, [[톱밥]]을 섞은 빵 배급[* 결국 참다 못해 사람들이 항의하자 힌켈의 대꾸가 압권이다. "대체 뭘 더 바래? '''최고급 목재에서 나온 거란 말이야!'''"] 따위에 견디다 못해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자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숙련된 노동자들을 무작정 다 죽이면 공장을 돌리기 힘들 테니 다른 일꾼이 숙련될 때까지 일을 시킨 다음에 모조리 처형하자는 부하의 의견을 수용하여 결국 기술적인 숙청으로 마무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다른 분야의 유명인인 히틀러와 채플린은 둘다 1889년 4월생으로 출생년월이 같고 외모도 상당히 닮은 편이었다. 그런데 상술한 것처럼 대중적으로는 채플린이 먼저 유명해졌기 때문에 히틀러는 집권 초기에 자신이 원래 기른 특유의 콧수염을 두고 채플린을 흉내낸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연히 나치 독일에서는 본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지만 히틀러 본인은 [[포르투갈 제2공화국|포르투갈]]을 통해 필름을 입수해 두 번이나 감상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부관 로후스 미슈는 그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물론 히틀러도 자신을 풍자한 영화라는 걸 못 알아볼 만큼 바보는 아니지만 히틀러 자신은 집권 전까지 꽤 긴 시간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도자가 나타날 길을 닦는 혁명가, 선동가로 여겼다. 그 시기를 회고할 수 있어 좋아했을지도.] 영화에는 힌켈 외에도 실존 인물들을 패러디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헤르만 괴링]]을 패러디한 '헤링(Herring/청어)',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패러디한 가비치(Garbage/쓰레기), [[베니토 무솔리니]]를 패러디한 '박테리아'의 독재자 '벤지노 나팔로니'(코믹한 [[이탈리아어]] 억양의 영어를 구사) 등.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채플린은 "'''영웅을 욕하는 비뚤어진 자'''"라는 식의 내용이 담긴 엄청난 양의 협박 편지에 시달렸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상기한 이유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당시에는 나치의 추악한 실상이 알려지기 전이라 나치를 옹호하는 미국인이 적잖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나 현재에나 미국 인구 구성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중에서도 인구 수 2위가 [[독일계 미국인]]인 것도 한 몫 했다.][* 전쟁 직전 미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존경하는 지도자 1위로 히틀러, 3위로 무솔리니가 꼽힐 정도였다. 아무리 민낯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심각한 수준. 사실 유럽인들 중에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넣어 죽인다는 것이 왜 나쁜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냥 [[반유대주의]]가 심했던 것. 참고로 2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이다.] 채플린은 영화 개봉 이후 ‘러시아 전쟁구제 미국위원회’로부터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당시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을 지지하는 연설을 요청받아 수행했다. 이같은 활동과 작품 세계에서 드러나는 [[아나키즘]]적인 이상, [[자본주의]] 비판 등으로 인해 채플린은 전쟁이 끝난 1940년대 후반부터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의해 시달리게 되었고 계속된 [[매카시즘]]의 광풍은 결국 1952년에 채플린을 미국에서 추방시켰다. 사실 메카시를 비롯한 미국 국무부의 극우 관계자들은 유대인 학살 초기부터 어떻게든 함구시키고 은폐시키려 했고 도망쳐 온 유대인들에게는 죽어도 내 알 바 아니고 너희들은 이 땅에 발 못 붙인다면서 독일로 돌려보냈다. 전후에도 학살에 연관된 인원들을 솜방망이 처벌하거나 무죄로 풀어 줬으니 나치와 홀로코스트,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한 찰리 채플린이 아니꼬왔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